[대한민국 패션 공급망 혁신 리포트 ①]
“브랜드 성장?”...더 이상 좋은 공장이 아니다
연매출 50억 넘은 브랜드, 다음 성장은 제조·소싱 역량이 좌우한다

“상품은 잘 만듭니다. 문제는 잘 팔리는 상품을 다시 만드는 일입니다.”
최근 만난 한 온라인 패션 브랜드 대표는 회사의 가장 큰 고민을 이렇게 설명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브랜드의 경쟁력은 디자인과 마케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상품을 기획하고, SNS에서 화제를 만들고, 무신사 랭킹에 오르면 성장할 수 있었다.
실제로 국내 온라인 패션시장은 지난 10년 동안 눈부신 성장을 이어왔다. 무신사를 비롯해 29CM, 에이블리, W컨셉 등 플랫폼이 빠르게 성장했고, 자사몰(D2C)을 기반으로 연매출 30~50억 원 규모의 브랜드도 크게 늘었다.
하지만 시장은 이제 또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다음은?”
연매출 50억 원을 넘어 100억 원, 300억 원 규모로 성장하는 순간 브랜드들은 공통적으로 같은 벽을 만난다.
- 잘 팔리는 상품을 다시 만들지 못한다.
- 필요한 시점에 공급하지 못한다.
- 생산이 늦어지고, 리오더가 끊기며, 재고는 늘어난다.
상품보다 공급망이 회사를 흔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최근 만난 한 여성복 브랜드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매출이 30억 원일 때는 디자인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100억 원을 넘어서니 디자인보다 생산이 더 어렵습니다. 요즘은 좋은 공장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브랜드의 속도에 맞춰 움직일 수 있는 제조 파트너를 찾는 것이 가장 큰 과제가 됐습니다.”
이 한마디가 지금 K-패션이 맞이한 변화를 가장 잘 설명한다. 패션산업의 경쟁력은 이제 디자인에서 공급망으로 이동하고 있다.
# “더 싸게”에서 “더 빨리”로…공급망의 기준이 바뀌다
1990년대 이후 국내 패션기업의 공급망 전략은 매우 단순했다. “더 싸게 만들 수 있는 곳을 찾아라.”
중국이 열리자 생산은 중국으로 향했다. 중국 인건비가 오르자 베트남과 인도네시아가 대안이 됐다. 이후 미얀마와 방글라데시가 뒤를 이었고, 팬데믹 직전에는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국가들까지 새로운 생산기지 후보로 거론됐다.
패션기업은 해마다 생산지를 옮겼고, 공급망의 기준은 오직 하나였다. 제조원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시 패션시장은 백화점과 대리점 중심이었다. 판매수수료는 높았고, 매장 운영비와 광고비도 계속 늘었다. 브랜드가 수익을 남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제조원가를 줄이는 것이었다.

초보자도 바로 작업이 가능한 중국의 자동화 제조 시스템
국내 제조는 자연스럽게 경쟁력을 잃어갔다. ‘메이드 인 코리아’는 프리미엄보다 높은 원가를 의미하는 단어가 되어갔다. 하지만 팬데믹을 거치며 이 공식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팬데믹 때문에 국내 제조가 다시 주목받았다고 말한다.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일 뿐이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이커머스가 패션산업의 운영방식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점이다. 무신사, 29CM, 에이블리, 자사몰 중심의 D2C 브랜드들은 더 이상 시즌 단위로 움직이지 않는다. 먼저 시장을 테스트한다. 판매 데이터를 본다. 잘 팔리면 다시 만든다. 팔리지 않으면 바로 멈춘다. 이른바 반응생산(Response Production)이다.
이제 브랜드가 제조기업에게 묻는 질문은 달라졌다.
- “얼마나 싸게 만들 수 있습니까?”가 아니라
- “얼마나 빨리 다시 만들 수 있습니까?”
- “우리 판매 데이터를 보고 함께 대응할 수 있습니까?”
- “생산 리스크까지 같이 관리할 수 있습니까?”
공급망의 기준이 원가에서 속도로 이동한 것이다.
# 유니클로는 왜 서울에 새로운 벤더를 뒀나?
유니클로는 이러한 변화를 가장 먼저 보여준 글로벌 사례 가운데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유니클로를 대량생산 기업으로 기억하지만 최근 움직임은 다르다. 대표적인 것이 UTme! 프로그램이다. 소비자가 원하는 그래픽을 즉석에서 티셔츠에 출력해 판매한다. 핵심은 DTG(Digital To Garment) 기술이다.
한 장도 만들 수 있고, 디자인 수정도 즉시 가능하다. 잘 팔리는 디자인은 생산량을 늘리고, 반응이 없는 디자인은 대량생산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프린팅 서비스가 아니다. ‘기획 → 생산 → 판매’라는 기존 구조를 ‘판매 → 생산 → 확장’으로 바꾸는 공급망 혁신이다.
실제로 최근 국내 DTP 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최소 몇 장부터 생산이 가능하냐’는 문의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요즘은 ‘오늘 판매해서 내일 출고할 수 있느냐’를 먼저 묻습니다. 브랜드가 원하는 것은 프린팅이 아니라 반응생산 시스템입니다.”
이 변화는 국내 시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서울을 중심으로 디지털 프린팅 전문기업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화이트하우스, 티잉크, 위블링 등은 수십억 원 규모의 설비를 투자하며 DTP 기반 생산 인프라를 확대하고 있다.
이들의 역할은 단순히 프린트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온라인 브랜드가 오늘 콘텐츠를 올리고, 내일 판매를 시작하고, 모레 리오더를 진행할 수 있도록 공급망을 설계하는 것이다.
반응생산에 최적화한 화이트하우스
또 다른 변화도 있다. 최근 중국 허베이에 생산기지를 둔 티셔츠 전문기업은 서울 인근에 대규모 쇼룸을 구축하고 수백 가지 무지 티셔츠를 상시 보유한 채 국내 브랜드를 대상으로 소량부터 대량까지 동일한 가격으로 공급하고 있다.
브랜드는 더 이상 원단 개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필요한 순간 바로 생산 가능한 공급망을 확보하는 것이 경쟁력이 됐다. 결국 지금 패션기업이 사고 있는 것은 티셔츠가 아니다. 시간(Time)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새로운 제조 생태계다.
# 좋은 공장이 아니라 ‘좋은 파트너’…제조기업도 서비스업
국내 제조기업의 가장 큰 문제는 정말 기술력일까? 많은 사람들은 봉제 인력 부족과 고령화, 노후 설비를 먼저 이야기한다. 물론 모두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지금 온라인 브랜드가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은 의외로 다른 곳에 있다.
“좋은 공장을 찾기 어렵다기보다,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일하는 공장을 찾기 어렵습니다.” 서울에서 연매출 100억 원 규모의 캐주얼 브랜드를 운영하는 한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생산은 외주를 줄 수 있지만 공급망은 외주를 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회사를 키울수록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생산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고객과 상품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는 이어 “문제는 그런 제조 파트너가 아직 많지 않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말은 지금 온라인 브랜드들이 제조기업에 기대하는 역할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전에는 작업지시서를 보내면 그대로 생산해 주는 공장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브랜드는 생산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공급망을 함께 운영할 파트너를 찾고 있다.
# OEM 시대는 끝났다…브랜드가 원하는 것은 ODM 2.0
국내 제조기업의 대부분은 지금까지 OEM 방식으로 성장해 왔다. 브랜드가 디자인을 보내면 패턴을 만들고, 샘플을 제작하고, 생산한 뒤 납품하는 구조였다. 생산 품질과 납기, 가격이 가장 중요한 경쟁력이었다.
제조기업과 브랜드와의 네트워킹을 위한 B패션 소싱랩 2026
하지만 온라인 브랜드는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판매 데이터가 매일 바뀌고, 상품 기획도 매주 달라진다. 잘 팔리는 상품은 일주일 안에 다시 생산해야 하고, 반응이 없는 상품은 즉시 중단해야 한다. 이런 시장에서는 제조기업도 새로운 역할이 필요하다. 단순히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단을 제안하고, 생산 방식을 설계하며, 최소 생산수량(MOQ)을 함께 고민하고, 리오더 시점을 제안하며, 생산 리스크까지 관리하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제조기업은 ‘생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진화해야 한다.
서울 금천에서 20년 넘게 여성복을 생산해 온 한 제조기업 대표도 최근 변화의 속도를 체감하고 있다.
“예전에는 작업지시서대로만 만들면 됐습니다. 지금은 브랜드에서 먼저 ‘이 원단이 더 좋지 않겠느냐’ , ‘생산 일정을 어떻게 가져가면 좋겠느냐’는 제안을 기다립니다. 결국 제조기업도 먼저 제안하지 않으면 선택받기 어렵습니다.”
그는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OEM에서 ODM으로, 다시 ODM 2.0으로 넘어가는 변화다.
# 브랜드 조직도도 바뀌고 있다
AI는 패션기업 내부 조직도까지 바꾸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브랜드는 디자이너와 MD를 많이 채용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생성형 AI가 디자인 시안을 만들고, 상품기획을 보조하며, 마케팅 콘텐츠까지 제작한다. 디자인 업무의 생산성은 크게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가장 많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 의외로 SCM 전문가다. 실제로 온라인 브랜드 대표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비슷한 고민을 듣게 된다.
- “상품은 만들 수 있는데 생산을 관리할 사람이 없습니다.”
- “공장을 연결할 사람이 없습니다.”
- “리오더를 운영할 사람이 없습니다.”
디자인보다 공급망이 더 어려워진 것이다. 패션기업 내부에서도 역할은 점점 분리된다. 브랜드는 고객을 이해하고, 콘텐츠를 만들며, 팬덤을 키운다. 반면 생산 운영은 전문 제조기업과 함께 수행한다. 패션기업은 브랜드 회사가 되고, 제조기업은 공급망 회사가 되는 것이다.
# 제조기업에도 새로운 인프라가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는 사람만 바꾼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생산 인프라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AI 디자인과 3D 의상 시뮬레이션이다. 생성형 AI는 디자인 기획 속도를 높이고, CLO 기반 3D 시뮬레이션은 샘플 제작 횟수를 줄인다.
디지털 패턴 시스템은 수정 시간을 단축하고, MES와 ERP는 생산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관리한다.
DTG·DTP 기반 디지털 프린팅은 최소 생산수량의 한계를 없애고, 자동 재단과 스마트 설비는 품질 편차를 줄인다. 이러한 인프라는 단순한 설비 투자가 아니다. 숙련자의 경험을 데이터로 바꾸는 과정이다.
제조업이 젊은 인재를 끌어들이기 어려운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다. 여전히 경험 중심으로 일하는 환경에서는 새로운 세대가 들어오기 어렵다. 하지만 AI와 디지털 시스템이 생산을 표준화하면 초보자도 더 빠르게 현장에 적응할 수 있다. 결국 제조업의 경쟁력은 사람을 더 많이 뽑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더 쉽게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 정부도 ‘공장’이 아니라 ‘공급망’을 지원해야 한다

금천패션제조지원센터가 오는 7월 24일 제조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G-패션 제조산업 활성화 기업세미나]를 개최한다
최근 지자체들의 정책 방향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서울 금천구는 오는 24일 [온라인 브랜드 시대, 제조기업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제조산업 활성화 기업 세미나를 개최한다. 이에 앞서 부산은 지난 6월 18일 개최한 ‘B.FASHION Sourcing Lab’을 통해 제조기업과 브랜드, 패션테크 기업이 실제 프로젝트를 만들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
공통점은 하나다. 더 이상 공장 한 곳을 지원하는 사업이 아니다. 브랜드와 제조를 연결하고, 시장과 기술을 연결하며, 사람과 데이터를 연결하는 공급망 생태계 구축 사업이라는 점이다.
패션 제조기업은 오랫동안 품질과 납기, 가격으로 평가받았다. 앞으로도 이것들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브랜드의 선택을 받기 어렵다. 브랜드가 원하는 것은 생산업체가 아니다. 브랜드의 속도를 이해하는 파트너다. 앞으로 경쟁력 있는 제조기업은 가장 옷을 잘 만드는 기업이 아니라 브랜드가 가장 믿고 맡길 수 있는 공급망 서비스 기업이 될 것이다.
패션산업은 더 이상 디자인만으로 경쟁하지 않는다. 브랜드는 고객을 가장 잘 이해하는 회사가 되어야 하고, 제조기업은 가장 신뢰받는 공급망 운영 기업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AI 시대, 대한민국 제조업이 다시 성장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정인기 에디터 ingi@dito.fashion
[대한민국 패션 공급망 혁신 리포트 ①]
“브랜드 성장?”...더 이상 좋은 공장이 아니다
“상품은 잘 만듭니다. 문제는 잘 팔리는 상품을 다시 만드는 일입니다.”
최근 만난 한 온라인 패션 브랜드 대표는 회사의 가장 큰 고민을 이렇게 설명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브랜드의 경쟁력은 디자인과 마케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상품을 기획하고, SNS에서 화제를 만들고, 무신사 랭킹에 오르면 성장할 수 있었다.
실제로 국내 온라인 패션시장은 지난 10년 동안 눈부신 성장을 이어왔다. 무신사를 비롯해 29CM, 에이블리, W컨셉 등 플랫폼이 빠르게 성장했고, 자사몰(D2C)을 기반으로 연매출 30~50억 원 규모의 브랜드도 크게 늘었다.
하지만 시장은 이제 또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다음은?”
연매출 50억 원을 넘어 100억 원, 300억 원 규모로 성장하는 순간 브랜드들은 공통적으로 같은 벽을 만난다.
상품보다 공급망이 회사를 흔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최근 만난 한 여성복 브랜드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매출이 30억 원일 때는 디자인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100억 원을 넘어서니 디자인보다 생산이 더 어렵습니다. 요즘은 좋은 공장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브랜드의 속도에 맞춰 움직일 수 있는 제조 파트너를 찾는 것이 가장 큰 과제가 됐습니다.”
이 한마디가 지금 K-패션이 맞이한 변화를 가장 잘 설명한다. 패션산업의 경쟁력은 이제 디자인에서 공급망으로 이동하고 있다.
# “더 싸게”에서 “더 빨리”로…공급망의 기준이 바뀌다
1990년대 이후 국내 패션기업의 공급망 전략은 매우 단순했다. “더 싸게 만들 수 있는 곳을 찾아라.”

중국이 열리자 생산은 중국으로 향했다. 중국 인건비가 오르자 베트남과 인도네시아가 대안이 됐다. 이후 미얀마와 방글라데시가 뒤를 이었고, 팬데믹 직전에는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국가들까지 새로운 생산기지 후보로 거론됐다.
패션기업은 해마다 생산지를 옮겼고, 공급망의 기준은 오직 하나였다. 제조원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시 패션시장은 백화점과 대리점 중심이었다. 판매수수료는 높았고, 매장 운영비와 광고비도 계속 늘었다. 브랜드가 수익을 남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제조원가를 줄이는 것이었다.
초보자도 바로 작업이 가능한 중국의 자동화 제조 시스템
국내 제조는 자연스럽게 경쟁력을 잃어갔다. ‘메이드 인 코리아’는 프리미엄보다 높은 원가를 의미하는 단어가 되어갔다. 하지만 팬데믹을 거치며 이 공식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팬데믹 때문에 국내 제조가 다시 주목받았다고 말한다.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일 뿐이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이커머스가 패션산업의 운영방식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점이다. 무신사, 29CM, 에이블리, 자사몰 중심의 D2C 브랜드들은 더 이상 시즌 단위로 움직이지 않는다. 먼저 시장을 테스트한다. 판매 데이터를 본다. 잘 팔리면 다시 만든다. 팔리지 않으면 바로 멈춘다. 이른바 반응생산(Response Production)이다.
이제 브랜드가 제조기업에게 묻는 질문은 달라졌다.
공급망의 기준이 원가에서 속도로 이동한 것이다.
# 유니클로는 왜 서울에 새로운 벤더를 뒀나?
유니클로는 이러한 변화를 가장 먼저 보여준 글로벌 사례 가운데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유니클로를 대량생산 기업으로 기억하지만 최근 움직임은 다르다. 대표적인 것이 UTme! 프로그램이다. 소비자가 원하는 그래픽을 즉석에서 티셔츠에 출력해 판매한다. 핵심은 DTG(Digital To Garment) 기술이다.
한 장도 만들 수 있고, 디자인 수정도 즉시 가능하다. 잘 팔리는 디자인은 생산량을 늘리고, 반응이 없는 디자인은 대량생산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프린팅 서비스가 아니다. ‘기획 → 생산 → 판매’라는 기존 구조를 ‘판매 → 생산 → 확장’으로 바꾸는 공급망 혁신이다.
실제로 최근 국내 DTP 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최소 몇 장부터 생산이 가능하냐’는 문의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요즘은 ‘오늘 판매해서 내일 출고할 수 있느냐’를 먼저 묻습니다. 브랜드가 원하는 것은 프린팅이 아니라 반응생산 시스템입니다.”
이 변화는 국내 시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서울을 중심으로 디지털 프린팅 전문기업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화이트하우스, 티잉크, 위블링 등은 수십억 원 규모의 설비를 투자하며 DTP 기반 생산 인프라를 확대하고 있다.
이들의 역할은 단순히 프린트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온라인 브랜드가 오늘 콘텐츠를 올리고, 내일 판매를 시작하고, 모레 리오더를 진행할 수 있도록 공급망을 설계하는 것이다.
또 다른 변화도 있다. 최근 중국 허베이에 생산기지를 둔 티셔츠 전문기업은 서울 인근에 대규모 쇼룸을 구축하고 수백 가지 무지 티셔츠를 상시 보유한 채 국내 브랜드를 대상으로 소량부터 대량까지 동일한 가격으로 공급하고 있다.
브랜드는 더 이상 원단 개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필요한 순간 바로 생산 가능한 공급망을 확보하는 것이 경쟁력이 됐다. 결국 지금 패션기업이 사고 있는 것은 티셔츠가 아니다. 시간(Time)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새로운 제조 생태계다.
# 좋은 공장이 아니라 ‘좋은 파트너’…제조기업도 서비스업
국내 제조기업의 가장 큰 문제는 정말 기술력일까? 많은 사람들은 봉제 인력 부족과 고령화, 노후 설비를 먼저 이야기한다. 물론 모두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지금 온라인 브랜드가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은 의외로 다른 곳에 있다.
“좋은 공장을 찾기 어렵다기보다,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일하는 공장을 찾기 어렵습니다.” 서울에서 연매출 100억 원 규모의 캐주얼 브랜드를 운영하는 한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생산은 외주를 줄 수 있지만 공급망은 외주를 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회사를 키울수록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생산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고객과 상품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는 이어 “문제는 그런 제조 파트너가 아직 많지 않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말은 지금 온라인 브랜드들이 제조기업에 기대하는 역할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전에는 작업지시서를 보내면 그대로 생산해 주는 공장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브랜드는 생산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공급망을 함께 운영할 파트너를 찾고 있다.
# OEM 시대는 끝났다…브랜드가 원하는 것은 ODM 2.0
국내 제조기업의 대부분은 지금까지 OEM 방식으로 성장해 왔다. 브랜드가 디자인을 보내면 패턴을 만들고, 샘플을 제작하고, 생산한 뒤 납품하는 구조였다. 생산 품질과 납기, 가격이 가장 중요한 경쟁력이었다.
하지만 온라인 브랜드는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판매 데이터가 매일 바뀌고, 상품 기획도 매주 달라진다. 잘 팔리는 상품은 일주일 안에 다시 생산해야 하고, 반응이 없는 상품은 즉시 중단해야 한다. 이런 시장에서는 제조기업도 새로운 역할이 필요하다. 단순히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단을 제안하고, 생산 방식을 설계하며, 최소 생산수량(MOQ)을 함께 고민하고, 리오더 시점을 제안하며, 생산 리스크까지 관리하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제조기업은 ‘생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진화해야 한다.
서울 금천에서 20년 넘게 여성복을 생산해 온 한 제조기업 대표도 최근 변화의 속도를 체감하고 있다.
“예전에는 작업지시서대로만 만들면 됐습니다. 지금은 브랜드에서 먼저 ‘이 원단이 더 좋지 않겠느냐’ , ‘생산 일정을 어떻게 가져가면 좋겠느냐’는 제안을 기다립니다. 결국 제조기업도 먼저 제안하지 않으면 선택받기 어렵습니다.”
그는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OEM에서 ODM으로, 다시 ODM 2.0으로 넘어가는 변화다.
# 브랜드 조직도도 바뀌고 있다
AI는 패션기업 내부 조직도까지 바꾸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브랜드는 디자이너와 MD를 많이 채용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생성형 AI가 디자인 시안을 만들고, 상품기획을 보조하며, 마케팅 콘텐츠까지 제작한다. 디자인 업무의 생산성은 크게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가장 많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 의외로 SCM 전문가다. 실제로 온라인 브랜드 대표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비슷한 고민을 듣게 된다.
디자인보다 공급망이 더 어려워진 것이다. 패션기업 내부에서도 역할은 점점 분리된다. 브랜드는 고객을 이해하고, 콘텐츠를 만들며, 팬덤을 키운다. 반면 생산 운영은 전문 제조기업과 함께 수행한다. 패션기업은 브랜드 회사가 되고, 제조기업은 공급망 회사가 되는 것이다.
# 제조기업에도 새로운 인프라가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는 사람만 바꾼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생산 인프라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AI 디자인과 3D 의상 시뮬레이션이다. 생성형 AI는 디자인 기획 속도를 높이고, CLO 기반 3D 시뮬레이션은 샘플 제작 횟수를 줄인다.
디지털 패턴 시스템은 수정 시간을 단축하고, MES와 ERP는 생산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관리한다.
DTG·DTP 기반 디지털 프린팅은 최소 생산수량의 한계를 없애고, 자동 재단과 스마트 설비는 품질 편차를 줄인다. 이러한 인프라는 단순한 설비 투자가 아니다. 숙련자의 경험을 데이터로 바꾸는 과정이다.
제조업이 젊은 인재를 끌어들이기 어려운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다. 여전히 경험 중심으로 일하는 환경에서는 새로운 세대가 들어오기 어렵다. 하지만 AI와 디지털 시스템이 생산을 표준화하면 초보자도 더 빠르게 현장에 적응할 수 있다. 결국 제조업의 경쟁력은 사람을 더 많이 뽑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더 쉽게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 정부도 ‘공장’이 아니라 ‘공급망’을 지원해야 한다
금천패션제조지원센터가 오는 7월 24일 제조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G-패션 제조산업 활성화 기업세미나]를 개최한다
최근 지자체들의 정책 방향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서울 금천구는 오는 24일 [온라인 브랜드 시대, 제조기업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제조산업 활성화 기업 세미나를 개최한다. 이에 앞서 부산은 지난 6월 18일 개최한 ‘B.FASHION Sourcing Lab’을 통해 제조기업과 브랜드, 패션테크 기업이 실제 프로젝트를 만들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
공통점은 하나다. 더 이상 공장 한 곳을 지원하는 사업이 아니다. 브랜드와 제조를 연결하고, 시장과 기술을 연결하며, 사람과 데이터를 연결하는 공급망 생태계 구축 사업이라는 점이다.
패션 제조기업은 오랫동안 품질과 납기, 가격으로 평가받았다. 앞으로도 이것들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브랜드의 선택을 받기 어렵다. 브랜드가 원하는 것은 생산업체가 아니다. 브랜드의 속도를 이해하는 파트너다. 앞으로 경쟁력 있는 제조기업은 가장 옷을 잘 만드는 기업이 아니라 브랜드가 가장 믿고 맡길 수 있는 공급망 서비스 기업이 될 것이다.
패션산업은 더 이상 디자인만으로 경쟁하지 않는다. 브랜드는 고객을 가장 잘 이해하는 회사가 되어야 하고, 제조기업은 가장 신뢰받는 공급망 운영 기업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AI 시대, 대한민국 제조업이 다시 성장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정인기 에디터 ingi@dito.fash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