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싱을 모르는 브랜드는 50억원 벽을 넘지 못한다
스티치잇·비에파의 브랜드 전환이 드러낸 K패션 성장 병목

한남 플래그십 스토어 [사진=이아(EAAH) 홈페이지]
패션 시장에서 소싱 기업이 직접 브랜드를 만드는 흐름은 단순한 사업 전환이 아니라 국내 패션기업의 취약한 공급망 구조를 드러내는 경고음으로 읽힌다.
# 소싱 기업이 브랜드를 만든 이유
최근 패션업계에서 주목해야 할 사례는 비에파와 스티치잇이다. 두 기업은 처음부터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출발하지 않았다. 브랜드의 생산과 소싱을 돕기 위해 시장에 들어왔다. 그러나 현장에서 국내 브랜드의 생산 이해 부족, 원가 관리 부재, 리오더 대응 실패, 제조 파트너십 부재를 반복해서 경험했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이 쌓은 소싱 역량을 직접 증명하기 위해 자체 브랜드를 만들었다.
윤순민 비에파 대표는 한양대에서 의류학을 전공한 뒤 소싱과 생산 현장에 먼저 뛰어들었다. 수많은 온라인 브랜드의 생산을 맡으며 원단, 패턴, 봉제, 품질, 납기, 원가 구조를 몸으로 익혔다. 그 중에는 내로라하는 글로벌 브랜드로 성공한 곳도 여럿이다. 그러나 그는 국내 패션기업의 관행에서 한계를 봤다. 전문성은 부족한데 요구는 일방적이고, 제조와 소싱을 단순 하청으로 바라보는 분위기가 강했다.
윤 대표는 “브랜드들은 소싱을 비용으로 본다. 하지만 실제로 브랜드 경쟁력의 절반은 제조와 공급망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경영자와 디자이너, MD가 새겨야 할 대목이다. 브랜드의 경쟁력은 룩북과 콘텐츠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팔리는 상품을 일정한 품질로 다시 만들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사진=이아 홈페이지]
비에파는 이 문제의식 끝에 여성복 브랜드 ‘이아(EAAH)’를 키웠다. 이아는 온라인 중심 여성복 브랜드임에도 백화점 브랜드 수준의 품질과 안정적 생산 기반을 무기로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연매출 100억원을 올린 데 이어 올해는 200억원을 바라보고 있다. 이 성장은 단순한 매출 확대가 아니다. 소싱을 이해하는 기업이 브랜드를 만들었을 때 무엇이 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결과다.
스티치잇을 전개하는 팩토리유니콘도 비슷한 배경에서 출발했다. 이 회사는 의류 제조 공급망을 디지털화하겠다는 목표로 사업을 시작했다. 브랜드와 공장을 연결하는 수준을 넘어, 브랜드가 생산을 이해하고 공급망을 운영할 수 있도록 돕는 제조 운영 시스템을 지향했다. 백찬 스티치잇 대표가 현장에서 확인한 문제는 분명했다. 패션 브랜드는 상품 기획과 마케팅에는 익숙하지만, 실제 성장을 좌우하는 생산과 공급망 운영에는 취약했다.
백 대표는 스티치잇을 출범하기 전 스트리트 캐주얼 브랜드를 전개했다. 패션 비전공자였던 그는 생산 현장에서 겪은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제조업의 진화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다.
그는 “제조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공급망도 브랜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말은 지금 K패션이 놓치고 있는 핵심을 찌른다. 제조는 단순한 하청이 아니다. 상품 경쟁력을 함께 만드는 과정이다. 공급망은 비용을 줄이는 뒷단 업무가 아니라 브랜드 신뢰를 쌓는 전면의 전략이다.
스티치잇은 축적한 소싱 인프라를 직접 증명하기 위해 지난해 러닝웨어 브랜드 ‘네스클(네거티브 스플릿 클럽, 이하 NESCL)’을 런칭했다. NESCL은 초기부터 빠르게 시장 반응을 얻었다. 런칭 첫해 매출은 20억원에 가까웠다. 최근 더현대 서울 팝업스토어에서는 7일 동안 1억원의 매출을 기록했고, 롯데백화점 연합 팝업스토어에서는 일주일간 7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올해는 올리브영, 무신사, 롯데, 현대 등 온오프라인 채널을 넓히고, 대만 홀세일을 시작으로 해외 시장도 확대한다. 회사측은 100억원 달성이 무난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50억원 이후 브랜드 성장을 가르는 것은 공급망이다
네스클(NESCL) 팝업 현장
국내 패션 브랜드는 감각이 부족해서 실패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도 높은 디자이너와 MD, 콘텐츠를 만드는 마케터는 많다. 문제는 그 감각을 일정한 품질과 가격, 납기, 물량으로 전환하는 소싱 시스템이 약하다는 점이다. SNS에서 반응이 생기고 플랫폼에서 판매가 붙는 것까지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 반응을 안정적인 매출로 키우는 단계에서 많은 브랜드가 멈춘다.
연매출 10억~30억원 규모까지는 감각과 콘텐츠가 성장을 이끈다. 특정 아이템이 터지고, 인플루언서 노출이 붙고, 플랫폼 랭킹에 오르면 매출은 빠르게 오른다. 그러나 50억원을 넘는 순간 게임의 규칙은 달라진다. 이때부터는 예쁜 옷을 만드는 능력보다 팔리는 옷을 제때 다시 만드는 능력이 중요하다. 디자인보다 운영, 마케팅보다 공급망, 감각보다 시스템이 성패를 가른다.
많은 브랜드는 소싱을 여전히 외주 업무로 본다. 좋은 공장을 찾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더 싼 견적을 받으면 해결된다고 여긴다. 생산 담당자가 알아서 처리할 일로 넘긴다. 그러나 소싱은 단순 발주가 아니다. 원단 선택, 패턴, 봉제, 부자재, MOQ, 납기, 원가, 리오더, 물류, 재고 회전이 하나로 맞물린 경영 전략이다.
디자이너가 원단의 수급 구조를 모르고 디자인을 확정하면 생산은 시작부터 흔들린다. MD가 목표 원가를 역산하지 않고 판매가를 정하면 마진 구조가 무너진다. 경영자가 매출 목표만 세우고 생산 캐파를 확보하지 않으면 히트 상품은 기회가 아니라 리스크가 된다. 팔리는 상품을 제때 공급하지 못하면 고객은 떠난다. 반대로 수요를 잘못 읽고 과잉 생산하면 재고가 이익을 잠식한다.
백찬 대표의 “공급망도 브랜딩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 지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브랜드 경험은 광고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같은 상품을 다시 사고 싶을 때 구매할 수 있는 안정성, 사이즈와 품질의 일관성, 빠른 리오더, 합리적 가격도 브랜드 경험이다. 이 모든 것은 탄탄한 공급망에서 나온다.
윤순민 대표가 “브랜드 경쟁력의 절반은 제조와 공급망에서 나온다”고 말한 이유도 같다. 디자인이 아무리 좋아도 원단 수급이 불안정하면 상품은 이어지지 않는다. 온라인에서 반응이 폭발해도 리오더가 늦으면 매출 기회는 사라진다. 가격을 잘못 설계하면 많이 팔수록 손실이 커진다. 결국 브랜드의 성장은 공급망에서 검증된다.
# 경영자는 ‘팔릴 상품’보다 ‘반복 생산 가능한 구조’를 파악해야
경영자에게 필요한 것은 매출 목표보다 공급망 설계다. 100억원 브랜드가 되려면 100억원 매출을 감당할 생산 구조가 먼저 있어야 한다. 200억~300억원 브랜드로 커지려면 시즌 기획, 원단 선점, 생산 캐파 확보, 리오더 대응, 물류, 재고 관리, 판매 데이터 분석이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이 구조 없이 성장한 브랜드는 어느 순간 재고, 납기, 품질 문제 앞에서 멈춘다.
디자이너에게도 시사점은 분명하다. 창의성은 생산 가능성을 만날 때 상품이 된다. 원단 수급이 불안정한 디자인, 봉제 난도가 지나치게 높은 구조, 리오더가 불가능한 소재 조합은 시장 반응이 좋아도 오래 팔 수 없다. 디자인은 감각의 결과물이지만, 상품은 공급망의 결과물이다. 디자이너가 생산 구조를 이해할수록 브랜드의 생존 가능성은 높아진다.
MD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MD는 더 이상 판매 기획자에 머물 수 없다. 원가 구조, 납기, 물량 계획, 리오더 가능성, 재고 회전율을 함께 설계해야 한다. 히트 상품을 찾는 능력만큼 중요한 것은 히트 상품을 반복 생산하는 구조를 만드는 능력이다. 판매 데이터와 생산 리드타임이 연결되지 않으면 MD의 기획은 일회성 성과에 그친다.
# K패션의 다음 성장은 디지털 소싱 생태계에서 나온다

[사진=네스클 홈페이지]
공급망 환경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과거 국내 패션기업은 프로모션 업체와 생산 전문가의 네트워크에 의존해 성장했다. 브랜드 내부에 생산 전문성이 부족해도 외부 생태계가 원단, 봉제, 품질, 납기를 조율했다. 그러나 이 생태계는 빠르게 약화되고 있다. 생산 전문가는 고령화되고, 봉제 인력은 줄고, 젊은 인력은 제조 현장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국내 생산만으로 가격과 물량을 맞추기 어렵고, 해외 생산도 예전만큼 단순하지 않다.
동남아 생산은 대량 생산에는 강점이 있지만 소량 다품종, 빠른 리오더, 잦은 디자인 변경에는 한계가 있다. 중국도 과거와 다르다. 예전에는 한국 브랜드의 유연한 생산 기지였지만, 이제 많은 중국 제조기업은 ODM과 OBM으로 이동하고 있다. 단순 하청보다 자체 기획과 자체 브랜드, 자체 유통을 지향한다. 작은 브랜드일수록 좋은 공장을 찾기 더 어려워지는 이유다.
이제 K패션은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어떤 브랜드가 감각적인가보다 어떤 브랜드가 지속 가능한 공급망을 갖고 있는가를 봐야 한다. 어떤 브랜드가 SNS에서 뜨는가보다 팔리는 상품을 안정적으로 반복 생산할 수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 해외에서 반응이 있느냐보다 그 반응을 매출로 전환할 생산·물류·리오더 시스템이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정부와 기관의 지원 방향도 달라져야 한다. 지금까지 패션 지원사업은 전시, 마케팅, 해외 바이어 상담, 플랫폼 입점에 치우친 측면이 컸다. 판로 지원은 필요하다. 그러나 팔 기회를 만드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팔린 상품을 제때, 적정 원가로, 안정적 품질로 공급하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초기 브랜드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홍보 지원이 아니라 제조·소싱 인프라다.
# 브랜드-제조기업, 진정한 파트너십 절실
네스클 팝업 현장
브랜드와 공장을 단순 매칭하는 방식도 한계가 있다. 브랜드가 성장 단계별 생산 전략을 세우도록 도와야 한다. 어떤 상품은 국내에서 테스트하고, 어떤 상품은 중국에서 빠르게 대응하며, 어떤 상품은 동남아에서 대량화할지 판단해야 한다. 원단과 부자재 네트워크를 만들고, MOQ와 원가를 관리하며, 디지털 생산관리 시스템을 활용하는 역량도 키워야 한다.
제조기업 역시 달라져야 한다. 단순 임가공에 머물면 가격 압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브랜드의 성장 파트너로 참여하려면 디지털 툴을 도입하고, 젊은 브랜드와 소통하는 방식을 바꾸며, 기획과 생산을 함께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백 대표의 말처럼 공급망도 브랜딩이 필요하다. 좋은 제조 파트너십은 이제 브랜드의 보이지 않는 자산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성장 자산이다.
비에파와 스티치잇의 브랜드 전환은 한편으로 아쉬운 일이다. 이들이 처음 꿈꾼 것은 더 많은 브랜드를 성장시키는 소싱 플랫폼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선택은 시장이 소싱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동시에 소싱을 이해하는 기업이 브랜드를 만들면 더 빠르고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앞으로 살아남는 브랜드는 콘텐츠만 잘 만드는 기업이 아니다. 콘텐츠와 공급망을 동시에 장악한 기업이다. 경영자는 공급망을 비용이 아니라 성장 전략으로 봐야 한다. 디자이너는 생산 가능성을 창의성의 제약이 아니라 완성도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MD는 판매 데이터와 생산 구조를 함께 읽어야 한다.
K패션의 다음 성장은 화려한 룩북이나 바이럴 콘텐츠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좋은 원단을 찾고, 좋은 공장을 연결하고, 빠르게 테스트하고, 정확하게 리오더하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생산을 조정하는 소싱 생태계에서 나온다. NESC과 EAAH가 먼저 보여준 길은 분명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몇몇 젊은 기업의 예외적 성취를 산업 전체의 성장 인프라로 확장하는 일이다.
정인기 에디터 ingi@dito.fashion
소싱을 모르는 브랜드는 50억원 벽을 넘지 못한다
한남 플래그십 스토어 [사진=이아(EAAH) 홈페이지]
패션 시장에서 소싱 기업이 직접 브랜드를 만드는 흐름은 단순한 사업 전환이 아니라 국내 패션기업의 취약한 공급망 구조를 드러내는 경고음으로 읽힌다.
# 소싱 기업이 브랜드를 만든 이유
최근 패션업계에서 주목해야 할 사례는 비에파와 스티치잇이다. 두 기업은 처음부터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출발하지 않았다. 브랜드의 생산과 소싱을 돕기 위해 시장에 들어왔다. 그러나 현장에서 국내 브랜드의 생산 이해 부족, 원가 관리 부재, 리오더 대응 실패, 제조 파트너십 부재를 반복해서 경험했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이 쌓은 소싱 역량을 직접 증명하기 위해 자체 브랜드를 만들었다.
윤순민 비에파 대표는 한양대에서 의류학을 전공한 뒤 소싱과 생산 현장에 먼저 뛰어들었다. 수많은 온라인 브랜드의 생산을 맡으며 원단, 패턴, 봉제, 품질, 납기, 원가 구조를 몸으로 익혔다. 그 중에는 내로라하는 글로벌 브랜드로 성공한 곳도 여럿이다. 그러나 그는 국내 패션기업의 관행에서 한계를 봤다. 전문성은 부족한데 요구는 일방적이고, 제조와 소싱을 단순 하청으로 바라보는 분위기가 강했다.
윤 대표는 “브랜드들은 소싱을 비용으로 본다. 하지만 실제로 브랜드 경쟁력의 절반은 제조와 공급망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경영자와 디자이너, MD가 새겨야 할 대목이다. 브랜드의 경쟁력은 룩북과 콘텐츠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팔리는 상품을 일정한 품질로 다시 만들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비에파는 이 문제의식 끝에 여성복 브랜드 ‘이아(EAAH)’를 키웠다. 이아는 온라인 중심 여성복 브랜드임에도 백화점 브랜드 수준의 품질과 안정적 생산 기반을 무기로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연매출 100억원을 올린 데 이어 올해는 200억원을 바라보고 있다. 이 성장은 단순한 매출 확대가 아니다. 소싱을 이해하는 기업이 브랜드를 만들었을 때 무엇이 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결과다.
스티치잇을 전개하는 팩토리유니콘도 비슷한 배경에서 출발했다. 이 회사는 의류 제조 공급망을 디지털화하겠다는 목표로 사업을 시작했다. 브랜드와 공장을 연결하는 수준을 넘어, 브랜드가 생산을 이해하고 공급망을 운영할 수 있도록 돕는 제조 운영 시스템을 지향했다. 백찬 스티치잇 대표가 현장에서 확인한 문제는 분명했다. 패션 브랜드는 상품 기획과 마케팅에는 익숙하지만, 실제 성장을 좌우하는 생산과 공급망 운영에는 취약했다.
백 대표는 스티치잇을 출범하기 전 스트리트 캐주얼 브랜드를 전개했다. 패션 비전공자였던 그는 생산 현장에서 겪은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제조업의 진화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다.
그는 “제조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공급망도 브랜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말은 지금 K패션이 놓치고 있는 핵심을 찌른다. 제조는 단순한 하청이 아니다. 상품 경쟁력을 함께 만드는 과정이다. 공급망은 비용을 줄이는 뒷단 업무가 아니라 브랜드 신뢰를 쌓는 전면의 전략이다.
스티치잇은 축적한 소싱 인프라를 직접 증명하기 위해 지난해 러닝웨어 브랜드 ‘네스클(네거티브 스플릿 클럽, 이하 NESCL)’을 런칭했다. NESCL은 초기부터 빠르게 시장 반응을 얻었다. 런칭 첫해 매출은 20억원에 가까웠다. 최근 더현대 서울 팝업스토어에서는 7일 동안 1억원의 매출을 기록했고, 롯데백화점 연합 팝업스토어에서는 일주일간 7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올해는 올리브영, 무신사, 롯데, 현대 등 온오프라인 채널을 넓히고, 대만 홀세일을 시작으로 해외 시장도 확대한다. 회사측은 100억원 달성이 무난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50억원 이후 브랜드 성장을 가르는 것은 공급망이다
국내 패션 브랜드는 감각이 부족해서 실패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도 높은 디자이너와 MD, 콘텐츠를 만드는 마케터는 많다. 문제는 그 감각을 일정한 품질과 가격, 납기, 물량으로 전환하는 소싱 시스템이 약하다는 점이다. SNS에서 반응이 생기고 플랫폼에서 판매가 붙는 것까지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 반응을 안정적인 매출로 키우는 단계에서 많은 브랜드가 멈춘다.
연매출 10억~30억원 규모까지는 감각과 콘텐츠가 성장을 이끈다. 특정 아이템이 터지고, 인플루언서 노출이 붙고, 플랫폼 랭킹에 오르면 매출은 빠르게 오른다. 그러나 50억원을 넘는 순간 게임의 규칙은 달라진다. 이때부터는 예쁜 옷을 만드는 능력보다 팔리는 옷을 제때 다시 만드는 능력이 중요하다. 디자인보다 운영, 마케팅보다 공급망, 감각보다 시스템이 성패를 가른다.
많은 브랜드는 소싱을 여전히 외주 업무로 본다. 좋은 공장을 찾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더 싼 견적을 받으면 해결된다고 여긴다. 생산 담당자가 알아서 처리할 일로 넘긴다. 그러나 소싱은 단순 발주가 아니다. 원단 선택, 패턴, 봉제, 부자재, MOQ, 납기, 원가, 리오더, 물류, 재고 회전이 하나로 맞물린 경영 전략이다.
디자이너가 원단의 수급 구조를 모르고 디자인을 확정하면 생산은 시작부터 흔들린다. MD가 목표 원가를 역산하지 않고 판매가를 정하면 마진 구조가 무너진다. 경영자가 매출 목표만 세우고 생산 캐파를 확보하지 않으면 히트 상품은 기회가 아니라 리스크가 된다. 팔리는 상품을 제때 공급하지 못하면 고객은 떠난다. 반대로 수요를 잘못 읽고 과잉 생산하면 재고가 이익을 잠식한다.
백찬 대표의 “공급망도 브랜딩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 지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브랜드 경험은 광고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같은 상품을 다시 사고 싶을 때 구매할 수 있는 안정성, 사이즈와 품질의 일관성, 빠른 리오더, 합리적 가격도 브랜드 경험이다. 이 모든 것은 탄탄한 공급망에서 나온다.
윤순민 대표가 “브랜드 경쟁력의 절반은 제조와 공급망에서 나온다”고 말한 이유도 같다. 디자인이 아무리 좋아도 원단 수급이 불안정하면 상품은 이어지지 않는다. 온라인에서 반응이 폭발해도 리오더가 늦으면 매출 기회는 사라진다. 가격을 잘못 설계하면 많이 팔수록 손실이 커진다. 결국 브랜드의 성장은 공급망에서 검증된다.
# 경영자는 ‘팔릴 상품’보다 ‘반복 생산 가능한 구조’를 파악해야
경영자에게 필요한 것은 매출 목표보다 공급망 설계다. 100억원 브랜드가 되려면 100억원 매출을 감당할 생산 구조가 먼저 있어야 한다. 200억~300억원 브랜드로 커지려면 시즌 기획, 원단 선점, 생산 캐파 확보, 리오더 대응, 물류, 재고 관리, 판매 데이터 분석이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이 구조 없이 성장한 브랜드는 어느 순간 재고, 납기, 품질 문제 앞에서 멈춘다.
디자이너에게도 시사점은 분명하다. 창의성은 생산 가능성을 만날 때 상품이 된다. 원단 수급이 불안정한 디자인, 봉제 난도가 지나치게 높은 구조, 리오더가 불가능한 소재 조합은 시장 반응이 좋아도 오래 팔 수 없다. 디자인은 감각의 결과물이지만, 상품은 공급망의 결과물이다. 디자이너가 생산 구조를 이해할수록 브랜드의 생존 가능성은 높아진다.
MD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MD는 더 이상 판매 기획자에 머물 수 없다. 원가 구조, 납기, 물량 계획, 리오더 가능성, 재고 회전율을 함께 설계해야 한다. 히트 상품을 찾는 능력만큼 중요한 것은 히트 상품을 반복 생산하는 구조를 만드는 능력이다. 판매 데이터와 생산 리드타임이 연결되지 않으면 MD의 기획은 일회성 성과에 그친다.
# K패션의 다음 성장은 디지털 소싱 생태계에서 나온다
[사진=네스클 홈페이지]
공급망 환경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과거 국내 패션기업은 프로모션 업체와 생산 전문가의 네트워크에 의존해 성장했다. 브랜드 내부에 생산 전문성이 부족해도 외부 생태계가 원단, 봉제, 품질, 납기를 조율했다. 그러나 이 생태계는 빠르게 약화되고 있다. 생산 전문가는 고령화되고, 봉제 인력은 줄고, 젊은 인력은 제조 현장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국내 생산만으로 가격과 물량을 맞추기 어렵고, 해외 생산도 예전만큼 단순하지 않다.
동남아 생산은 대량 생산에는 강점이 있지만 소량 다품종, 빠른 리오더, 잦은 디자인 변경에는 한계가 있다. 중국도 과거와 다르다. 예전에는 한국 브랜드의 유연한 생산 기지였지만, 이제 많은 중국 제조기업은 ODM과 OBM으로 이동하고 있다. 단순 하청보다 자체 기획과 자체 브랜드, 자체 유통을 지향한다. 작은 브랜드일수록 좋은 공장을 찾기 더 어려워지는 이유다.
이제 K패션은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어떤 브랜드가 감각적인가보다 어떤 브랜드가 지속 가능한 공급망을 갖고 있는가를 봐야 한다. 어떤 브랜드가 SNS에서 뜨는가보다 팔리는 상품을 안정적으로 반복 생산할 수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 해외에서 반응이 있느냐보다 그 반응을 매출로 전환할 생산·물류·리오더 시스템이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정부와 기관의 지원 방향도 달라져야 한다. 지금까지 패션 지원사업은 전시, 마케팅, 해외 바이어 상담, 플랫폼 입점에 치우친 측면이 컸다. 판로 지원은 필요하다. 그러나 팔 기회를 만드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팔린 상품을 제때, 적정 원가로, 안정적 품질로 공급하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초기 브랜드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홍보 지원이 아니라 제조·소싱 인프라다.
# 브랜드-제조기업, 진정한 파트너십 절실
브랜드와 공장을 단순 매칭하는 방식도 한계가 있다. 브랜드가 성장 단계별 생산 전략을 세우도록 도와야 한다. 어떤 상품은 국내에서 테스트하고, 어떤 상품은 중국에서 빠르게 대응하며, 어떤 상품은 동남아에서 대량화할지 판단해야 한다. 원단과 부자재 네트워크를 만들고, MOQ와 원가를 관리하며, 디지털 생산관리 시스템을 활용하는 역량도 키워야 한다.
제조기업 역시 달라져야 한다. 단순 임가공에 머물면 가격 압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브랜드의 성장 파트너로 참여하려면 디지털 툴을 도입하고, 젊은 브랜드와 소통하는 방식을 바꾸며, 기획과 생산을 함께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백 대표의 말처럼 공급망도 브랜딩이 필요하다. 좋은 제조 파트너십은 이제 브랜드의 보이지 않는 자산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성장 자산이다.
비에파와 스티치잇의 브랜드 전환은 한편으로 아쉬운 일이다. 이들이 처음 꿈꾼 것은 더 많은 브랜드를 성장시키는 소싱 플랫폼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선택은 시장이 소싱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동시에 소싱을 이해하는 기업이 브랜드를 만들면 더 빠르고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앞으로 살아남는 브랜드는 콘텐츠만 잘 만드는 기업이 아니다. 콘텐츠와 공급망을 동시에 장악한 기업이다. 경영자는 공급망을 비용이 아니라 성장 전략으로 봐야 한다. 디자이너는 생산 가능성을 창의성의 제약이 아니라 완성도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MD는 판매 데이터와 생산 구조를 함께 읽어야 한다.
K패션의 다음 성장은 화려한 룩북이나 바이럴 콘텐츠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좋은 원단을 찾고, 좋은 공장을 연결하고, 빠르게 테스트하고, 정확하게 리오더하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생산을 조정하는 소싱 생태계에서 나온다. NESC과 EAAH가 먼저 보여준 길은 분명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몇몇 젊은 기업의 예외적 성취를 산업 전체의 성장 인프라로 확장하는 일이다.
정인기 에디터 ingi@dito.fashion